그곳.....박물관 그리고

국립공주박물관

착희 2009. 11. 17. 21:41

국립공주박물관에 가 보았다.

2층은 공사중이라 보지 못했고

플래시 없이 사진을 찍어야 하니

그 아름다운 보물들을 제 모습 그대로 못 담아와서 많이 아쉽다. 

 공주 대통사 석조

보물 제148호 제149호

석조란 돌을 파서 물을 담아 쓰도록 만든 큰 물통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두거나 큰 행사가 끝난 후 그릇을 씻을 때, 또는 연을 기르기 위해 사용한다. 이들 석조는 대통사(공주시 반죽동 소재)의 강당터 앞쪽에 나란히 있던 것이다. 통일 신라시대의 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연꽃무늬가 조각된 둥근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고,석조의 가장자리에 한가닥 띠를 돌리고 몸 중앙에는 약간 가는 두줄의 띠가 새겨져 있다. 백제문화 특유의 우아한 조형미를 지닌 이 석조는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서 각각 반죽동 석조(보물 148호 높이 75cm) 중동석조(보물 149호 높이72cm)로 불리고 있다.

 

 

 공주 서혈사지출토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979호

공주시 웅진동 망월산 동쪽 서혈사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옷은 우견편단(양어깨 중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차림)이며,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아래로 편 항마촉지인이다. 불상의 등에 있는 구멍은 광배(불상의 뒤에 부착한 장식품)와 연결된 자국이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와 아래에는 여덟 잎의 아름다운 연꽃을 표현했으며 가운데 부분의 8각면에는 눈 모양을 장식하였다.

이러한 모양의 대좌를 받치는 지대석에는 극락의 천사인 천인과 새의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를 새겼다. 이 불상은각 부분의 세부표현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옥외 전시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진묘수가 남쪽을 향하여 서 있었다.

묘실의 관대 위에는 왕과 왕비의 목관재가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류와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허리띠, 금동제신발, 금제팔찌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환두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두침 및 족좌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의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동탁은잔 등이 출토되었다

 

진묘수

국보 162호

 진묘수(석수)는 기괴한 신수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惡鬼)를 쫓아 사자(死者)를 수호한다는 중국의 묘장풍습(墓葬風習)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전국시대 초나라 무덤에서 나무 조각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대에 이르러 무덤 앞에 기괴한 돌짐승을 세우거나 짐승모양을 무덤 안에 넣으면서부터 보편화되었다.
출토당시 무령왕릉 널길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진묘수는 뭉뚝한 입을 벌리고 있고 코는 크지만 콧구멍이 없다. 등에는 네 개의 융기(隆起)가 있고 머리 위 융기 상면의 패어진 홈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이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로 날개모양의 갈기가 도안처럼 부조되었다. 네 개의 짧은 다리가 있으며 발톱이 표현되어 있는데 뚜렷하지는 않다.

 

 

  관장식(왕)

국보 154호

왕의 머리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줄기와 꽃에 지름이 5mm정도인 영락을 달았다. 영락은 둥글고 작은 원판이며 여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 달았는데 모두 127개이다. [구당서]에‘(왕은) 검은 천으로 된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라는 기록으로 보면, 왕릉 출토의 관식은 왕이 평소 사용했던 비단모자의 좌우 혹은 전후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생각된다.

 신발

왕의 신발은 내측판,외측판과 바닥판의 3판을 서로 붙여 만들었다. 각 판은 다시 안에 은판이 있고 그 밖에 금동판을 덧댄 것이다. 신발 속에는 3중의 포가 붙어 있고, 얇은 나무껍질이 함께 나왔는데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앞부분이 조금 들려 있고, 10개의 철못이 박혀 있는데 단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사각추모양이다.
내측판의 표면에는 전면에 거북등 무늬가 구획되었는데, 그 안에는 꽃잎무늬를 장식하였다. 외측판 역시 거북등무늬가 타출되었는데, 내부에 꽃잎무늬와 더불어 봉황이 표현되어 있다.

   

발받침

국보 165호
왕의 베개와 발 받침은 모두 커다란 나무둥치를 역 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그 가운데 부분을 “U”와 “W”자 모양으로 파내어 각각 머리와 두 발이 올려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표면에는 검은 칠을 두껍게 한 다음 6각형의 거북등 무늬와 금 꽃으로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왕·왕비의 베개·발 받침은 각각 검은색과 붉은색을 띠어 대조를 이룬다.

청동거울

국보 161호

이 거울은 거울과 똑같은 문양을 새긴 틀에 동을 녹여 부어서 만든 것으로 가죽 끈이 끼워져 있는 거울걸이 아래에 의자손이라는 글씨가 있고, 7마리의 동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하여 의자손수대경이라 하며 테두리에 동물상의 문양대가 있는 수문연수대경에 포함된다.  

   

 귀걸이

국보 156호

왕의 귀걸이는 하나의 중심 고리에 작은 고리 2개를 연결고리로 하여 두 줄의 귀걸이를 매달았다. 큰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2개의 원통체를 대칭되게 연결하였고, 원통체의 끝에는 금실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심엽형 장식이 달려있다. 끝 장식은 큰 심엽형 장식을 중심으로 작은 심엽형 장식 2개를 대칭되게 매달았다. 작은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금 알갱이를 붙여 만든 투작구체 5개를 ‘0-0’모양의 고리로 연결하였다. 끝 장식은 담록색 곡옥에 누금수법 장식이 가미된 금 모자를 씌운것으로 금 모자에 좌우대칭으로 2개의 심엽형 장식이 달려 있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귀걸이가 경주의 금령총과 일본 구마모토현의 에다후나야마고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

 

 

 뒤꽂이

국보 159호

왕의 머리 부분에 있는 청동거울 위에서 발견되었다. 몸체부와 꽂이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날개를 펴고 나는 새의 모습을 닮았다. 몸체 윗부분에는 두개의 화문(花文)을 두드려 내고 아래쪽은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을 새겼다. 뒤꽂이는 머리에 꽂아 머리모양을 흐트러지지 않게 해주는 실용적인 기능과 함께 뒤꽃이 자체의 장식으로 머리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는 장식적인 용도를 함께 가진 장신구이다.  

 묘지석

국보 163호

왕릉의 널길 입구에 2장의 지석이 놓여 있었는데, 비록 내용은 소략하지만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해 주었고, 왕릉 출토유물과 관련된 유적·유물의 편년 연구에 기준이 되고 있다. 무령왕을 무덤에 안치할 때 묘지와 간지도, 매지권(買地券)을 만들어 넣었고, 그후 529년 왕비를 안치할 때 매지권을 상하로 뒤집어 뒤편에 왕비의 묘지를 새겼다.
이 지석은 우리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삼국시대의 무덤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비록 내용은 소략하지만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을 보충할 수 있었고, 매지권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인들의 사상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베게와 발받침 --왕비

  

 

묘지석--왕비 

 관장식(왕비)

국보 155호

왕비의 머리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과 화염문 장식을 투조하였다. 왕의 관식과는 달리 문양이 좌우대칭이며 영락을 달지 않았다. 중앙에는 7개의 연꽃잎이 바닥으로 늘어진 모습을, 그 위에는 막 피어오르는 꽃을 꽂은 꽃병을 투조하고 있어 불교적이 요소가 관식의 제작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왕비의 머리부근에서는 사각형과 오각형 금판장식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판 장식의 테두리에는 작은 구멍이 촘촘히 뚫려 있어 실을 이용, 관테에 장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귀걸이-왕비
국보 157호
모두 4쌍이 출토되었다. 머리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중심고리, 중간장식, 끝장식 등을 갖추었고, 발치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중심고리와 끝장식만 갖춘 것이다.

귀걸이1 : 노는 고리에 2점의 귀걸이를 매달아 만들었다. 길쭉한 귀걸이는 영락을 붙인 사슬모양 연결 금구에 탄환 모양의 끝장식을 매달았다. 짧은 귀걸이는 중간 장식으로 투작 반 구체를 덮어씌운 담록색 유리구슬을 사용하였고, 사슬형 금구에 사익형의 끝장식을 연결하였다.

귀걸이2 : 왕비의 발치 북쪽에서 팔찌와 함께 출토되었다. 크기는 아주 작다. 중심 고리에 금실을 두번 감은 다음 횡으로 두세 번 감아서 마무리 하였다. 끝장식은 작은 원형 영락이다.

 

 

 

금목걸이

국보 158호

모두 아홉 마디로 되어 있는 이 목걸이는 한 마디의 길이가 6cm정도인데 가운데가 가장 넓으며 6면으로 각져 있고 전체적으로 약간 휘었다.
각 마디의 양끝은 끈처럼 가늘게 늘여서 걸기 위한 고리를 만들고 끝은 다시 몸체에 다섯 바퀴 정도 정교하게 감아서 마무리하였다.
착용고리는 금봉을 말아 만든 세환(細環)이며, 여기에 9절 중 양끝 마디의 고리를 걸어 연결하였다.

 

 

베개

국보 164호

나무토막을 역 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윗부분을 U자형으로 파낸 다음 전면에 붉은 칠을 하였다.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같은 금박으로 육각형의 거북등무늬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였다. 육각형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안료로 비천(飛天), 새 그림, 어룡(魚龍), 연꽃, 인동(忍冬),네이파리꽃 등의 그림을 그렸다.
베개의 윗부분에는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두 마리의 봉황을 서로 마주보게 붙였다. 이 봉황의 부리와 귀의 일부분에 금박을 띠처럼 돌렸다. 입안에 는 청동막대를 박았으며, 봉황 밑에는 '甲·乙'자(字)가 붓글씨로 씌어 있다.

 

 

 

 
계유명 천불비상 (국보 108호)
이 비석모양의 불상은 상.하 두 개의 돌로, 연꽃무늬 받침과 비석이 있고, 그 위에 두 단으로 이루어진 지붕모양의 덮개돌이 얹혀져있는 모양이다.
둥근 연꽃받침위에 세워진 비석형태의 몸통에는 아래부분에 여래상과 보살상을 조각하고, 그 양쪽으로는 각기 4줄의 글씨를 새겼으며 나머지 몸체와 덮개돌 전면에는 작은 여래상을 가득 새겼다. 이 는 천불신앙에 의한 천불상(千佛像)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비석모양의 불상, 이른바 불비상은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시작하여 당나라까지 유행하였던 형식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연기지방에서 성행하였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의 내용은 「계유(癸酉,679)년 4월 15일에 백제유민(百濟遊民)인 신도(信徒) 250인이 국왕대신(國王大臣), 7세부모(七世父母), 법계중생(法界衆生)을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다」라고 되어 있다.

 

 

석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