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주박물관에 가 보았다.
2층은 공사중이라 보지 못했고
플래시 없이 사진을 찍어야 하니
그 아름다운 보물들을 제 모습 그대로 못 담아와서 많이 아쉽다.
공주 대통사 석조
보물 제148호 제149호
석조란 돌을 파서 물을 담아 쓰도록 만든 큰 물통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두거나 큰 행사가 끝난 후 그릇을 씻을 때, 또는 연을 기르기 위해 사용한다. 이들 석조는 대통사(공주시 반죽동 소재)의 강당터 앞쪽에 나란히 있던 것이다. 통일 신라시대의 사각형 석조와는 달리 연꽃무늬가 조각된 둥근 받침돌 위에 올려져 있고,석조의 가장자리에 한가닥 띠를 돌리고 몸 중앙에는 약간 가는 두줄의 띠가 새겨져 있다. 백제문화 특유의 우아한 조형미를 지닌 이 석조는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서 각각 반죽동 석조(보물 148호 높이 75cm) 중동석조(보물 149호 높이72cm)로 불리고 있다.
공주 서혈사지출토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979호
공주시 웅진동 망월산 동쪽 서혈사지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옷은 우견편단(양어깨 중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옷차림)이며,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아래로 편 항마촉지인이다. 불상의 등에 있는 구멍은 광배(불상의 뒤에 부착한 장식품)와 연결된 자국이다.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와 아래에는 여덟 잎의 아름다운 연꽃을 표현했으며 가운데 부분의 8각면에는 눈 모양을 장식하였다.
이러한 모양의 대좌를 받치는 지대석에는 극락의 천사인 천인과 새의몸에 인간의 얼굴을 한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를 새겼다. 이 불상은각 부분의 세부표현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옥외 전시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8종 2,906점이다.
연도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오수전 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지석 뒤에는 진묘수가 남쪽을 향하여 서 있었다.
묘실의 관대 위에는 왕과 왕비의 목관재가 가득 놓여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류와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중요 장신구류로는 금제관식, 금제이식, 금은제허리띠, 금동제신발, 금제팔찌 등이 있고 왕의 허리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용봉문환두대도가 출토되었다. 그 밖에 왕과 왕비의 두침 및 족좌가 목관 안에 놓여 있었고, 그 외의 중요 부장품으로는 청동거울 3면과 동탁은잔 등이 출토되었다
진묘수
국보 162호
진묘수(석수)는 기괴한 신수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귀(惡鬼)를 쫓아 사자(死者)를 수호한다는 중국의 묘장풍습(墓葬風習)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전국시대 초나라 무덤에서 나무 조각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대에 이르러 무덤 앞에 기괴한 돌짐승을 세우거나 짐승모양을 무덤 안에 넣으면서부터 보편화되었다.
출토당시 무령왕릉 널길 중앙에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진묘수는 뭉뚝한 입을 벌리고 있고 코는 크지만 콧구멍이 없다. 등에는 네 개의 융기(隆起)가 있고 머리 위 융기 상면의 패어진 홈에는 나뭇가지 모양의 철제 뿔이 꽂혀 있다. 몸통 좌우에는 앞뒤로 날개모양의 갈기가 도안처럼 부조되었다. 네 개의 짧은 다리가 있으며 발톱이 표현되어 있는데 뚜렷하지는 않다.
관장식(왕)
국보 154호
신발
내측판의 표면에는 전면에 거북등 무늬가 구획되었는데, 그 안에는 꽃잎무늬를 장식하였다. 외측판 역시 거북등무늬가 타출되었는데, 내부에 꽃잎무늬와 더불어 봉황이 표현되어 있다.
발받침
청동거울
국보 161호
귀걸이
국보 156호
뒤꽂이
국보 159호
묘지석
국보 163호
이 지석은 우리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삼국시대의 무덤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비록 내용은 소략하지만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을 보충할 수 있었고, 매지권에서 알 수 있듯이 백제인들의 사상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베게와 발받침 --왕비
묘지석--왕비
관장식(왕비)
국보 155호
귀걸이1 : 노는 고리에 2점의 귀걸이를 매달아 만들었다. 길쭉한 귀걸이는 영락을 붙인 사슬모양 연결 금구에 탄환 모양의 끝장식을 매달았다. 짧은 귀걸이는 중간 장식으로 투작 반 구체를 덮어씌운 담록색 유리구슬을 사용하였고, 사슬형 금구에 사익형의 끝장식을 연결하였다.
귀걸이2 : 왕비의 발치 북쪽에서 팔찌와 함께 출토되었다. 크기는 아주 작다. 중심 고리에 금실을 두번 감은 다음 횡으로 두세 번 감아서 마무리 하였다. 끝장식은 작은 원형 영락이다.
금목걸이
국보 158호
각 마디의 양끝은 끈처럼 가늘게 늘여서 걸기 위한 고리를 만들고 끝은 다시 몸체에 다섯 바퀴 정도 정교하게 감아서 마무리하였다.
착용고리는 금봉을 말아 만든 세환(細環)이며, 여기에 9절 중 양끝 마디의 고리를 걸어 연결하였다.
베개
국보 164호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같은 금박으로 육각형의 거북등무늬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였다. 육각형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안료로 비천(飛天), 새 그림, 어룡(魚龍), 연꽃, 인동(忍冬),네이파리꽃 등의 그림을 그렸다.
베개의 윗부분에는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두 마리의 봉황을 서로 마주보게 붙였다. 이 봉황의 부리와 귀의 일부분에 금박을 띠처럼 돌렸다. 입안에 는 청동막대를 박았으며, 봉황 밑에는 '甲·乙'자(字)가 붓글씨로 씌어 있다.
둥근 연꽃받침위에 세워진 비석형태의 몸통에는 아래부분에 여래상과 보살상을 조각하고, 그 양쪽으로는 각기 4줄의 글씨를 새겼으며 나머지 몸체와 덮개돌 전면에는 작은 여래상을 가득 새겼다. 이 는 천불신앙에 의한 천불상(千佛像)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비석모양의 불상, 이른바 불비상은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시작하여 당나라까지 유행하였던 형식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연기지방에서 성행하였다.
비석에 새겨진 글씨의 내용은 「계유(癸酉,679)년 4월 15일에 백제유민(百濟遊民)인 신도(信徒) 250인이 국왕대신(國王大臣), 7세부모(七世父母), 법계중생(法界衆生)을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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