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
문화재자료
제23호 (곡성군)
가을 들어가는 길이 참 이뻤던 기억이 난다.
그 길을 걸어가고 싶었지만
비 오는날 계곡을 끼고 들어가는 길은 걷지 않아도 이뻤다.
시도유형문화재 제83호 (곡성군)
태안사 광자대사비
보물 275호
태안사 광자대사탑
보물 274호
태안사 동종
보물 1349호
태안사대바라
보물 956호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
보물 273호
태안사 능파각
시도유형문화재 제82호 (곡성군)
태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이름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고, 법당에는 높이 1.4m되는 약사여래철불좌상을 모셨던 듯하다. 고려 고종 10년(1223)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1684)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초에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때 많은 피해를 입어서 지금 있는 건물은 대부분이 복원된 것이다.
경내에는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승무를 출 때 사용하던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 태안사동종(보물 1349호), 태안사일주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태안사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70호)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고, 법당에는 높이 1.4m되는 약사여래철불좌상을 모셨던 듯하다. 고려 고종 10년(1223)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 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1684)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초에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때 많은 피해를 입어서 지금 있는 건물은 대부분이 복원된 것이다.
경내에는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윤다의 부도인 광자대사탑(보물 제274호), 광자대사비(보물 제275호), 승무를 출 때 사용하던 태안사대바라(보물 제956호), 태안사동종(보물 1349호), 태안사일주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태안사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70호) 등이 있다.
태안사는 『동리산태안사사적(桐裏山泰安寺事蹟)』에 의하면 경덕왕 원년(742) 2월에 이름 모를 신승 세 분이 개창하고 그로부터 1백여년이 지난 뒤 혜철선사가 당나라 서당지장에게 법을 전수받고 문성왕 원년(839)에 귀국한 후 이곳에 신라하대 선문의 동리산파를 이룬 것은 문성왕 9년(847)이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864∼945년)가 크게 중창하였는데 이때의 가람 규모를 보면 건물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으며 법당에는 높이 1.4m되는 약사여래철불좌상이 봉안되었던 것 같다. 고종 10년(1223)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왕지를 받들어 중건하였으며, 조선시대는 초기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다가 숙종연간, 즉 숙종 10년(1684)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풍수지리설의 원조인 도선국사도 이곳 태안사에서 20세때부터 23세까지 혜철에게 가르침을 받고 크게 깨쳤다. 특히 조선 초기는 태종의 둘째아들 효녕대군(1396∼1486)이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기도 하다. 태안사는 한국전쟁 때 많은 건물이 피해를 입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그 후에 복원된 것이다. 경내는 혜철선사의 부도인 적인선사조륜청정탑과 광자대사 부도, 태안사동종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외 일주문과 3층석탑이 지방문화재와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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