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792호
괜시리 들어갔다.
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데...
그래도 소나무가 아름다워 보기 좋았다.
문화재 펌
조선 중기 문신인 이상길(1556∼1637)을 그린 초상화이다. 선생은 선조 18년(1585) 문과에 급제한 뒤 평안감사,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 초상화는 가로 93㎝, 세로 185㎝의 크기이고 의자에 앉은 모습을 그렸다. 머리에는 낮은 사모를 쓰고 붉은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아 보이지 않는다. 옷의 옆트임 안쪽으로 보이는 속옷과 양쪽 어깨의 기울기를 달리해 안정되어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조선 중기 초상화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나 얼굴에 있어 윤곽선의 농도를 다르게 하여 표현하는 방법은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수법으로 후대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모본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원본을 따라 충실하게 그렸고, 필체가 섬세하고 보관상태도 양호하여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초상화는 가로 93㎝, 세로 185㎝의 크기이고 의자에 앉은 모습을 그렸다. 머리에는 낮은 사모를 쓰고 붉은색의 관복을 입었으며,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마주 잡아 보이지 않는다. 옷의 옆트임 안쪽으로 보이는 속옷과 양쪽 어깨의 기울기를 달리해 안정되어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조선 중기 초상화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러나 얼굴에 있어 윤곽선의 농도를 다르게 하여 표현하는 방법은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수법으로 후대에 다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모본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원본을 따라 충실하게 그렸고, 필체가 섬세하고 보관상태도 양호하여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상길(李尙吉)(1556∼1637)은 조선의 문신(文臣)으로 자(字)는 사우(士祐), 호(號)는 동천(東川)이다. 벼슬은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청군(淸軍)이 강화에 육박하자 자결(自決)했다.
이 영정은 낮은 사모(紗帽)에 담홍색(淡紅色) 단령(團領)을 입고 공수자세(拱手姿勢)를 취하고 의자에 앉은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상(全身像)이다. 상용형식면에서 단령의 양쪽 트임새로 살짝 내비치는 과(과)와 첩리(帖裏), 양쪽 어깨의 경사진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앉음새를 매우 안정되게 나타내어 조선 중기 초상화(肖像畵)의 전형적인 특색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면(顔面)의 세부(細部) 묘사에 있어서는 이미 골상학(骨相學)에서 말하는 삼양(三陽), 삼음(三陰), 누당(淚堂), 와잠(臥蠶)을 경계로하여 선염기(渲染氣)를 짙게 안배함으로써 안면의 고심세(高深勢)를 나타내려는 도식화된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 있어, 이상길 재세시(在世時)의 묘법보다는 좀 더 후기의 초상화법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영정은 원본을 충실히 그려낸 이모본(移模本)으로서, 안면처리에만 이모시(移模時)의 시대색(時代色)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이 영정은 낮은 사모(紗帽)에 담홍색(淡紅色) 단령(團領)을 입고 공수자세(拱手姿勢)를 취하고 의자에 앉은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전신상(全身像)이다. 상용형식면에서 단령의 양쪽 트임새로 살짝 내비치는 과(과)와 첩리(帖裏), 양쪽 어깨의 경사진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앉음새를 매우 안정되게 나타내어 조선 중기 초상화(肖像畵)의 전형적인 특색을 보여준다. 그러나 안면(顔面)의 세부(細部) 묘사에 있어서는 이미 골상학(骨相學)에서 말하는 삼양(三陽), 삼음(三陰), 누당(淚堂), 와잠(臥蠶)을 경계로하여 선염기(渲染氣)를 짙게 안배함으로써 안면의 고심세(高深勢)를 나타내려는 도식화된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 있어, 이상길 재세시(在世時)의 묘법보다는 좀 더 후기의 초상화법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영정은 원본을 충실히 그려낸 이모본(移模本)으로서, 안면처리에만 이모시(移模時)의 시대색(時代色)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