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지,불상,탑,석등..

경주 원원사지의 삼층석탑

착희 2011. 12. 25. 22:09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산 8-2

보물 1429호

 

원원사지의 쌍탑을 만나러 갔다.

몇해전 산사를 찾아 다니며

사찰 문화재에 대한 궁금증을 공부하다 만난 책 허균의 사찰 100美 100選에서

이 탑의 조각에 대해 알게 되었고

꼭 만나고 싶은 탑으로 담아 두었다.

이번 걸음에 작정하고 찾아 가 보았다.

네비가 원원사 주차장까지 데려다 주니 별 어려움은 없었다.

원원사를 지나 소나무 숲을 바라보며 계단을 올랐다.

 

 

원원사지의 이 탑들은

금당 앞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1년 가을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복원한 것이다.

전체 높이 약 7m로 상륜부는 노반과 앙화까지만 남아 있다.

2중 기단 위에 3층으로 건립된 이 탑의 전반적인 구성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석탑이다. 

 

 

쌍탑중 서탑은 파손상태가 심각하였다.

 

 

1층 옥신 4면에는 각 1구씩의 사천왕상이 아주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상층 기단면석에는 4면에 3체씩 연화좌 위에 평복을 입은 십이지상

 

 

 

 

 

쌍탑중 동탑

 

 

 

 

 

 

 

 

 

 

 

 

그때 읽은 허균의 사찰 100美 100選중 원원사지삼층석탑에 대한 글을 퍼왔다.

읽어도 기억에 남아 있는것이 없으니.....쯧쯧

83> 경주 원원사지삼층석탑

사천왕상.십이지신상 동시에 새겨 호국의 신주 만다라 구현한 석탑

상층기단 한면에 3구씩 부조

옥신석엔 사천왕상 새겨넣어

국내 최초의 십이지 장식미술

신인종의 삼밀중 하나 일수도 

경주 원원사지삼층석탑(보물 제1429호)은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2번지 봉서산 기슭의 원원사지(사적 제46호)에 있다. 한 쌍의 석탑이 사지의 동쪽과 서쪽에 상대하여 서있는데, 규모와 형태는 서로가 비슷하다. 이 탑에서 주목되는 점은 기단과 옥신에 품위 있고 다양한 신상들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인데, 특히 기단 면석에 장식된 십이지신상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우리나라 석탑 십이지 장식미술의 최초의 작례라는 점에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크다.

원원사(遠願寺)는 원래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 명랑법사가 세운 금광사, 그리고 사천왕사와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문두루비법의 중심도량이었다. 원원사는 명랑 법사의 후계자인 안혜.낭융 등과 김유신.김의원 등 당시의 지도급 인사들이 함께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이다. 그러나 창건 이후의 역사 및 폐사시기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는 원원사지 석탑 복원에 관한 자초지종이다. 조선 순조 9년(1809년)에 울산에 사는 이모씨가 모화리 봉서산 기슭에 찾아왔다. 그곳에 조상의 묘를 쓰기로 작정하고 주변에 있던 원원사 석탑을 무참하게 쓸어버리고 정지작업을 강행했다. 그 후 대부분의 탑재가 땅속에 묻히거나 잡초에 덥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21년 어느 날 경주에 사는 삼산(杉山)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사냥하러 왔다가 우연히 탑재 일부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조선총독부에 보고했고, 총독부는 촉탁 소탕(小湯)씨를 현장에 보내 조사케 하여 원원사 탑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여러 해 동안 잊혀 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가 1929년 일본 경도제대의 능세(能勢丑三) 교수에 의해 탑재의 대부분이 수습.실측되었고, 그 후 1931년 12월 20일 경주유적보존회에 의해 두 탑이 복원됐다.

이렇게 해서 다시 빛을 보게 된 원원사 석탑의 옥신석과 기단 면석에서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확인됐다. 사천왕은 칼, 금강저, 보주 등의 지물을 들고 악귀를 밟고 선 입상의 형태로 1층 옥신석에 조각되어 있었고, 십이지신상은 도복차림의 수수인신 형태로 기단 면석을 돌아가며 사방에 새겨져 있었다. 이처럼 석탑에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함께 장식된 사례는 원원사 탑이 처음일 뿐만 아니라, 이 석탑이 후에 제작되는 십이지신상 석탑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미술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현재 전국에 유존하는 석탑은 수백 기에 달한다. 그러나 원원사지 삼층석탑처럼 기단 면석에 십이지상을 조각해 놓은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구례 화엄사 서오층석탑, 영양 현일동.화전동 삼층석탑, 안동 임하동 삼충석탑, 그리고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1010년) 정도가 같은 형식의 탑으로 꼽히고 있을 뿐이다.

화엄사 오층석탑은 2중 기단 위에 오층탑이 세워져 있는데, 제1층 옥신석에 사천왕상과 위쪽 기단에 팔부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기단에 무장한 십이지신상이 방위에 맞게 배치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개심사 석탑의 경우, 옥신석에 사천왕상이 없는 대신 위쪽 기단에 팔부중상이 1면에 2상씩 배치되어 있고, 십이지신상은 아래쪽 좁은 기단면석에 양각되어 있다. 나머지 탑들도 이와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원원사 석탑의 십이지신상은 이들 탑의 것과 비교할 때 규모도 더 웅대하고, 또 예술적 수준에 있어서도 훨씬 앞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원사 석탑의 십이지신상은 탑의 상층기단 한 면에 3구씩 모두 12구가 부조되어 있다. 정적인 분위기 속에 평복차림으로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십이지신상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거나 꿇어앉거나 하여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손 모양 역시 가슴 높이에서 합장하고 있는 것, 허리 부분에서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왼손을 올리고 오른 손을 내리고 있는 것 등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한편, 박대(博帶)를 머리 위쪽에서 원호를 그리며 휘날리게 표현한 것이라든지, 세부에 집착하지 않고 대상을 대범하게 파악하는 조형의식은 한국적 미의식의 발로라 할 것이다.

원원사 석탑의 십이지신상이 보여주는 ‘평복의 수수인신(獸首人身) 좌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부장품인 십이지 도용(陶俑)이나 묘지명 등의 십이지 조각에서 볼 수 자세와 비슷하다. 또한 원원사 석탑의 십이지상과 유사한 복장을 한 십이지신상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통일신라시대 왕릉 호석의 십이지신상에서 발견되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황복사지 기단, 헌덕왕릉 호석, 김유신묘 호석의 십이지상이 그런 예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김유신묘를 비롯한 이들 유적의 십이지신상들은 갑주무장한 여타 신라 왕릉의 십이지신상과 달리 원원사 탑의 것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십이지신상들은 머리 부분이 모두 우향(右向)하고 있는데, 이 같은 모습은 갑주 무장한 왕릉의 십이지신상의 자세와 다른 것이다. 왕릉 갑주무장 십이지신상의 경우 방위를 중심으로 하되, 어떤 것은 1군의 중심상만 이 남쪽을 보고 있는 것이 있고, 어떤 1군은 3분의 1이 사방위로 정면향이 되고 나머지 3분의 2는 사방위에 대하여 각각 좌우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점 또한 원원사지 석탑과 김유신묘 등의 십이지신상의 모습과 구별되는 것이다.

원원사탑에 있어서는 동서 탑의 십이지신상이 모두 머리를 우향하고 있으나 유독 북쪽 기단 면석의 축상(丑像)만이 머리를 왼쪽으로 돌려 자상(子像)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북쪽 면이 금당과 마주 대하는 쪽이니 만큼 3구의 십이지신상이 좌우 균형을 이루게 하여 안정감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원원사지 석탑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의미는 무엇일까?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먼저 원원사의 성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지만 원원사는 통일신라시대 문두루비법의 중심 도량이다. ‘문두루’는 범어 ‘무드라(Mudra)’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것으로 ‘신인(神印)’으로 의역된다. 그래서 문두루비법을 종지로 하는 종파를 신인종(神印宗)이라 하는 것이다. 명랑법사에 의해 처음으로 신라에 전해진 신인종은 〈관정경〉 12권 중에서 제7경인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다. 이 경에 따라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神呪] 등을 독송하면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고 국가를 수호하여 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신라시대에 문두루비법을 활용하여 효험을 얻었다는 기록이 사서에 전한다.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 군사가 신라를 침략하려들자 왕은 명랑법사에게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비법을 물었다. 이에 명랑법사는 경주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의했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우선 채백(彩帛)으로 가건물을 짓고 5방(方)에 신상(神像)을 세운 뒤 승려 12인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썼다. 이 비법의 효험으로 당나라 군사들이 타고 오던 배들이 모두 전복되어 전란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몇 가지 간접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원원사 석탑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문두루종, 즉 신인종의 교의(敎義)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보는 구체적인 이유는 첫째, 원원사가 신라통일시대에 신인종의 근본도량이고, 둘째 문두루, 즉 대신주(大神呪)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천왕을 비롯한 방위신이고, 셋째 십이지신 역시 방위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다섯 째 명량법사가 문두루비법을 행하는 의식에 참여했던 승려의 수가 열 두 명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십이지신상의 수인이 유별나게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평복을 입고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반적인 십이지신상의 모습과 다른 것으로,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수인은 밀교 삼밀(身. 口. 意) 중 신(身)에 해당하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천왕은 세계의 사방을 각각 수호하는 호법의 방위신이고, 십이지수는 원래 약사여래의 권속인 십이신장의 속수(屬獸)로 열 두 방위에 배치된다. 요컨대 원원사 동.서삼층석탑은 신주(神呪)를 목적으로 한 잡부밀교(雜部密敎)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방위신을 배치한 일종의 신주 만다라를 구현한 탑이 아닌가 한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원원사(遠願寺)는 원래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 명랑법사가 세운 금광사, 그리고 사천왕사와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문두루비법의 중심도량이었다. 원원사는 명랑 법사의 후계자인 안혜.낭융 등과 김유신.김의원 등 당시의 지도급 인사들이 함께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이다. 그러나 창건 이후의 역사 및 폐사시기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이야기는 원원사지 석탑 복원에 관한 자초지종이다. 조선 순조 9년(1809년)에 울산에 사는 이모씨가 모화리 봉서산 기슭에 찾아왔다. 그곳에 조상의 묘를 쓰기로 작정하고 주변에 있던 원원사 석탑을 무참하게 쓸어버리고 정지작업을 강행했다. 그 후 대부분의 탑재가 땅속에 묻히거나 잡초에 덥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21년 어느 날 경주에 사는 삼산(杉山)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사냥하러 왔다가 우연히 탑재 일부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조선총독부에 보고했고, 총독부는 촉탁 소탕(小湯)씨를 현장에 보내 조사케 하여 원원사 탑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여러 해 동안 잊혀 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가 1929년 일본 경도제대의 능세(能勢丑三) 교수에 의해 탑재의 대부분이 수습.실측되었고, 그 후 1931년 12월 20일 경주유적보존회에 의해 두 탑이 복원됐다.

이렇게 해서 다시 빛을 보게 된 원원사 석탑의 옥신석과 기단 면석에서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확인됐다. 사천왕은 칼, 금강저, 보주 등의 지물을 들고 악귀를 밟고 선 입상의 형태로 1층 옥신석에 조각되어 있었고, 십이지신상은 도복차림의 수수인신 형태로 기단 면석을 돌아가며 사방에 새겨져 있었다. 이처럼 석탑에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함께 장식된 사례는 원원사 탑이 처음일 뿐만 아니라, 이 석탑이 후에 제작되는 십이지신상 석탑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미술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하여 현재 전국에 유존하는 석탑은 수백 기에 달한다. 그러나 원원사지 삼층석탑처럼 기단 면석에 십이지상을 조각해 놓은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구례 화엄사 서오층석탑, 영양 현일동.화전동 삼층석탑, 안동 임하동 삼충석탑, 그리고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1010년) 정도가 같은 형식의 탑으로 꼽히고 있을 뿐이다.

화엄사 오층석탑은 2중 기단 위에 오층탑이 세워져 있는데, 제1층 옥신석에 사천왕상과 위쪽 기단에 팔부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기단에 무장한 십이지신상이 방위에 맞게 배치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개심사 석탑의 경우, 옥신석에 사천왕상이 없는 대신 위쪽 기단에 팔부중상이 1면에 2상씩 배치되어 있고, 십이지신상은 아래쪽 좁은 기단면석에 양각되어 있다. 나머지 탑들도 이와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원원사 석탑의 십이지신상은 이들 탑의 것과 비교할 때 규모도 더 웅대하고, 또 예술적 수준에 있어서도 훨씬 앞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원사 석탑의 십이지신상은 탑의 상층기단 한 면에 3구씩 모두 12구가 부조되어 있다. 정적인 분위기 속에 평복차림으로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십이지신상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거나 꿇어앉거나 하여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손 모양 역시 가슴 높이에서 합장하고 있는 것, 허리 부분에서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왼손을 올리고 오른 손을 내리고 있는 것 등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한편, 박대(博帶)를 머리 위쪽에서 원호를 그리며 휘날리게 표현한 것이라든지, 세부에 집착하지 않고 대상을 대범하게 파악하는 조형의식은 한국적 미의식의 발로라 할 것이다.

원원사 석탑의 십이지신상이 보여주는 ‘평복의 수수인신(獸首人身) 좌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부장품인 십이지 도용(陶俑)이나 묘지명 등의 십이지 조각에서 볼 수 자세와 비슷하다. 또한 원원사 석탑의 십이지상과 유사한 복장을 한 십이지신상은 경주를 중심으로 한 통일신라시대 왕릉 호석의 십이지신상에서 발견되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황복사지 기단, 헌덕왕릉 호석, 김유신묘 호석의 십이지상이 그런 예에 속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김유신묘를 비롯한 이들 유적의 십이지신상들은 갑주무장한 여타 신라 왕릉의 십이지신상과 달리 원원사 탑의 것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십이지신상들은 머리 부분이 모두 우향(右向)하고 있는데, 이 같은 모습은 갑주 무장한 왕릉의 십이지신상의 자세와 다른 것이다. 왕릉 갑주무장 십이지신상의 경우 방위를 중심으로 하되, 어떤 것은 1군의 중심상만 이 남쪽을 보고 있는 것이 있고, 어떤 1군은 3분의 1이 사방위로 정면향이 되고 나머지 3분의 2는 사방위에 대하여 각각 좌우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점 또한 원원사지 석탑과 김유신묘 등의 십이지신상의 모습과 구별되는 것이다.

원원사탑에 있어서는 동서 탑의 십이지신상이 모두 머리를 우향하고 있으나 유독 북쪽 기단 면석의 축상(丑像)만이 머리를 왼쪽으로 돌려 자상(子像)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북쪽 면이 금당과 마주 대하는 쪽이니 만큼 3구의 십이지신상이 좌우 균형을 이루게 하여 안정감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원원사지 석탑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의미는 무엇일까?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먼저 원원사의 성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지만 원원사는 통일신라시대 문두루비법의 중심 도량이다. ‘문두루’는 범어 ‘무드라(Mudra)’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것으로 ‘신인(神印)’으로 의역된다. 그래서 문두루비법을 종지로 하는 종파를 신인종(神印宗)이라 하는 것이다. 명랑법사에 의해 처음으로 신라에 전해진 신인종은 〈관정경〉 12권 중에서 제7경인 〈불설관정복마봉인대신주경(佛說灌頂伏魔封印大神呪經)〉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다. 이 경에 따라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神呪] 등을 독송하면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고 국가를 수호하여 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신라시대에 문두루비법을 활용하여 효험을 얻었다는 기록이 사서에 전한다.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 군사가 신라를 침략하려들자 왕은 명랑법사에게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비법을 물었다. 이에 명랑법사는 경주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의했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우선 채백(彩帛)으로 가건물을 짓고 5방(方)에 신상(神像)을 세운 뒤 승려 12인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썼다. 이 비법의 효험으로 당나라 군사들이 타고 오던 배들이 모두 전복되어 전란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몇 가지 간접 자료들을 통해서 볼 때 원원사 석탑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문두루종, 즉 신인종의 교의(敎義)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보는 구체적인 이유는 첫째, 원원사가 신라통일시대에 신인종의 근본도량이고, 둘째 문두루, 즉 대신주(大神呪)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천왕을 비롯한 방위신이고, 셋째 십이지신 역시 방위신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다섯 째 명량법사가 문두루비법을 행하는 의식에 참여했던 승려의 수가 열 두 명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언급할 것은 십이지신상의 수인이 유별나게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평복을 입고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일반적인 십이지신상의 모습과 다른 것으로,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수인은 밀교 삼밀(身. 口. 意) 중 신(身)에 해당하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천왕은 세계의 사방을 각각 수호하는 호법의 방위신이고, 십이지수는 원래 약사여래의 권속인 십이신장의 속수(屬獸)로 열 두 방위에 배치된다. 요컨대 원원사 동.서삼층석탑은 신주(神呪)를 목적으로 한 잡부밀교(雜部密敎)의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방위신을 배치한 일종의 신주 만다라를 구현한 탑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