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 찾아서(충북)

충북 제천시]월악산 신륵사

착희 2009. 10. 14. 20:47

충북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803-5

 

창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다.

1960년에 법당인 극락전을 중수하면서 쓴 『월악산신륵사중수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4년(582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이후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년) 때 원효대사가 고쳐지었고,

고려 공민왕 때 무학대사가 다시 고쳐지었다고 한다.

또 조선 광해군(재위 1608~1623년) 때 사명대사가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 기록과 함께 절에 남아있는 삼층석탑과 석재 및 극락전으로 미루어볼 때

신륵사는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창건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고려시대에서 조선 전기에 걸친 연혁은 전혀 알 수 없다.

임진왜란 후 조선시대 후기에 중건되었는데,

창건 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중건되기 전까지

상당히 오래 동안 폐사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건되었다고 하더라도 절터나 현존하는 건물로 보아

사세(寺勢)는 미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부터 선원(禪院)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60년에 한국전쟁으로 퇴락한 극락전을 중수한 바 있고,

1981년에 삼층석탑을 해체하여 보수한 바 있다.

이후 근래에 들어와 2001년에 산신각을 창건한 것을 비롯해

약사당과 요사를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륵사 천왕문

 

 극락전(시도유형문화재 제132호)

 

신륵사 삼층석탑

보물 제1296호

극락전 앞마당 중앙에 있는 삼층석탑은 2중기단, 3층의 탑신과 옥개, 상륜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신라계 석탑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1981년 4월에 해체 보수된 바 있으며,

당시 기단 내부에서 높이 3.5~5cm의 흙으로 빚어 만든

소형 탑 108개와 사리함 조각 2개 수습되어 국립청주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석은 각 면에 1개 씩 모두 4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주와 탱주를 새겨 각 면을 2간으로 나누었다.

갑석은 3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윗면에 완만한 구배를 두었고,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상층기단의 받침으로 삼았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모두 4장의 판석으로 만들었고,

우주와 탱주를 새겨 하층기단과 마찬가지로 각 면을 두 간으로 나누었다.

갑석은 3장의 판석으로 만들었으며,

상면에 구배를 두고 2단의 쇠시리로 탑신받침을 삼았다.

탑신과 옥개는 각 1개의 돌로 만들어졌다.

탑신은 각층이 동일한 형식으로 2층에서 높이를 많이 줄였으며,

우주만 돋을새김 했을 뿐 아무런 장식도 베풀지 않았다.

옥개석은 4단의 층급받침을 만들었으나 물끊기 홈은 두지 않았다.

처마는 얇은 편으로 아래 면은 수평선, 윗면은 반곡된 곡선으로 만들었다.

상면에는 1단의 쇠시리를 두어 상층탑신의 받침으로 삼았다.

상륜은 비교적 잘 남아있는 편이다.

방형의 노반, 반구형의 복발과 그 위의 앙화, 그리고 4층의 보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삼층석탑은 신라계 석탑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른 것으로 안정된 조형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층이 되어 약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시대는 신라 전성기에서 조금 내려온 것으로 보이며,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석탑은 신륵사의 연혁과 관련하여 신륵사가 적어도 신라 말 고려 초에는 창건되어 있었음을 증명해준다.


 

 신륵사 괘불지주

 넓은마당에 개 짖는 요리가 월악산이 떠나갈듯 하다

그 개 참선을 해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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